순흥안씨 문성공파 참판공파 찬성공파 시조 족보 돌림자 항렬표 인물

2025년 05월 10일 by 오르야

    순흥안씨 문성공파 참판공파 찬성공파 시조 족보 돌림자 항렬표 인물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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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문성공파 참판공파 찬성공파 시조 족보 돌림자 항렬표 인물
순흥안씨 문성공파 참판공파 찬성공파 시조 족보 돌림자 항렬표 인물

대한민국에서 열네 번째로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입니다. 2015년 통계청 기준으로 무려 52만여 명에 달하는 순흥안씨는 안씨(安氏)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그 역사와 영향력 또한 깊고 넓습니다. 문헌에 나타난 안씨의 본관은 109본에 이르지만, 현재는 순흥, 죽산, 광주 등 40여 본이 현존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중국의 안씨(顔氏 또는 安氏)와는 그 기원을 달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특히 순흥안씨는 우리 고유의 토착 성씨로서 그 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과연 순흥안씨는 어떤 역사를 품고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 찬란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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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의 기원과 시조

순흥안씨의 본관지, 순흥(順興)

순흥안씨의 관향(貫鄕)인 순흥은 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소백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고장으로, 예로부터 인재의 산실로 이름 높았습니다. 바로 이곳 순흥을 중심으로 뿌리내린 안씨가 바로 순흥안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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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안자미(安子美)와 초기 분파

순흥안씨의 시조는 고려 신종(神宗) 대에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시고, 이후 신호위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신 안자미(安子美) 선생입니다. 그야말로 가문의 문을 활짝 여신 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안자미 선생께서는 영유(孚), 영린(永麟), 영화(永和)라는 걸출한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이분들이 각각 순흥안씨의 큰 줄기를 이루는 3대 분파의 파조(派祖)가 되셨습니다.

제1파 추밀공파(樞密公派): 장남 안영유(安孚)의 후손

제2파 별장공파(別將公派): 차남 안영린(安永麟)의 후손

제3파 교서공파(校書公派): 삼남 안영화(安永和)의 후손

이 3대파는 다시 여러 지파로 나뉘어, 안영유의 후손에서 14개 파, 안영린의 후손에서 4개 파, 안영화의 후손에서 4개 파 등 총 22개 이상의 지파로 분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그 번성함이 실로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순흥안씨에서 분관된 본관들: 탐진안씨와 신죽산안씨

순흥안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분관(分貫)입니다. 시조 안자미 선생의 6세손이신 안목(安牧) 선생의 후손 중에서 새로운 본관을 열게 된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탐진안씨(耽津安氏)와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가 있습니다.

  • 탐진안씨: 안목 선생의 셋째 아들 안원린(安元璘)을 시조로 합니다. 안원린의 아들 안우(安祐)가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지면서 탐진(현재 전라남도 강진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 신죽산안씨: 안목 선생의 둘째 아들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하며,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면서 분관하였습니다.

이들 본관은 순흥안씨와 혈연적으로 매우 가까워, 각각 순흥안씨의 탐진군파와 죽성군파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는 순흥안씨 가문의 넓은 확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순흥안씨의 번성과 주요 인물

고려시대의 기틀: 안향(安珦) 선생

순흥안씨가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바로 시조 안자미의 증손이자, 추밀공파의 중시조 격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 선생입니다! 이 분이야말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실질적인 비조(鼻祖)로 추앙받는 위대한 학자이십니다. 안향 선생은 고려 원종(元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교서랑(校書郞),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 등 요직을 두루 거치셨습니다. 특히 충렬왕(忠烈王) 복위 후 판도판서사(判圖判書事)에 올라서는 국학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여 후진 양성에 진력하셨습니다. 그의 문하에서는 백이정(白頤正), 우탁(禹倬)과 같은 걸출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이는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을 거쳐 권근(權近)으로 이어져 조선 성리학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경기 부곡의 안자묘(安子廟)를 비롯하여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 등에 배향되어 그 학덕을 기리고 있으니, 가히 순흥안씨 최고의 자랑이라 할 만합니다.

대를 이은 명문가의 전통

안향 선생 이후 순흥안씨는 그야말로 명문가의 위상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무려 11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는데, 안향(安珦) - 안우기(安于器) - 안목(安牧) - 안원숭(安元崇) - 안원(安瑗) - 안종약(安從約) - 안구(安玖) - 안지귀(安知歸) - 안호(安瑚) - 안처선(安處善) - 안정(安珽)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20명이 봉군(封君)되었고, 학문의 최고 영예직인 대제학(大提學, 문형)을 17명이나 배출하였으니, 이는 조선시대 김씨, 이씨, 박씨 등과 더불어 6대 성씨로 인정받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특히 안축(安軸, 6세), 안종원(安宗源, 7세), 안경공(安景恭, 8세), 안순(安純, 9세), 안숭선(安崇善, 10세)은 5대에 걸쳐 대제학을 역임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순흥안씨 출신 과거 급제자는 총 641명에 달하며, 세부적으로는 문과 121명, 무과 91명, 사마시 327명, 역과 42명, 의과 24명, 음양과 26명, 율과 9명, 주학 1명 등으로, 문무 양반과 기술관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를 배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 분파별 주요 인물

각 분파에서도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 제1파 추밀공파: 앞서 언급한 안향 선생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로 찬성(贊成)을 지낸 안우기, 손자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안목 등이 가문을 빛냈습니다. * 제2파 별장공파: 안영린의 후손으로, 충숙왕(忠肅王)이 원나라에 머물 때 충절을 다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오르고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이르러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에 봉해진 안문개(安文凱)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충혜왕(忠惠王) 때 지공거(知貢擧, 과거 시험관)가 되어 송천봉(宋天鳳) 등 33인을 선발하고 옥대(玉帶)를 하사받기도 했습니다. * 제3파 교서공파: 안영화의 후손으로, 충숙왕 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2~1348)이 유명합니다. 그는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충혜왕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경기체가인 '죽계별곡(竹溪別曲)'과 한문 수필집 '관동와주(關東瓦注)'를 남겨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순흥안씨의 시련과 극복

정축지변(丁丑之變)의 아픔

이처럼 번성하던 순흥안씨에게도 혹독한 시련이 닥쳤습니다. 그중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조선 단종(端宗) 복위 운동과 관련된 정축지변(丁丑之變, 1457년)입니다. 당시 순흥에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錦城大君, 세조의 동생)이 영월에 유배된 단종과 연계하여 복위를 꾀하다 발각된 이 사건으로, 단종과 금성대군은 물론이고 순흥도호부에 세거하던 수많은 순흥안씨 인사들이 연루되어 멸문지화(滅門之禍)에 가까운 참화를 당했습니다. 무려 700여 명에 달하는 안씨들이 희생되거나 뿔뿔이 흩어져야 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연이은 사화와 일제의 탄압

정축지변 외에도 순흥안씨는 여러 정치적 격변 속에서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이은 신사무옥(辛巳誣獄, 1521년)에서는 안당(安瑭)과 그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처형당하는 비운을 맞았고,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 때는 안명세(安名世)가 참화를 입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는 안중근(安重根) 의사와 안명근(安明根) 의사의 항일 의거로 인해 일제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련들은 순흥안씨의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불의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근현대사의 빛나는 별, 순흥안씨 인물들

시련 속에서도 순흥안씨는 꺾이지 않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민족의 역사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근현대사에서 순흥안씨 인물들의 활약은 눈부십니다.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다

누가 뭐래도 순흥안씨를 대표하는 근현대 인물로는 겨레의 영웅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와 민족의 지도자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여 대한 남아의 기개를 만방에 떨쳤으며,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시기 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고 수많은 유묵을 남기셨습니다. 그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 의사 또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 등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독립협회 활동을 시작으로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힘썼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는 등 평생을 조국 독립과 민족 계몽 운동에 바치셨습니다. 이 외에도 애국가 작곡가로 알려진 안익태(安益泰), 민족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안재홍(安在鴻), 광복군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안춘생(安椿生)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가 순흥안씨 가문에서 배출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선생이 청년 시절의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을 숨겨준 인연이 있으며, 안중근 의사의 조카딸인 안미생(安美生) 여사는 김구 선생의 며느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安斗熙) 또한 순흥안씨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는 인물

순흥안씨의 저력은 현대에도 이어져 정관계, 학계, 문화예술계, 스포츠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정관계: 안경모(전 교통부장관), 안응모(전 내무부장관), 안동선, 안갑준, 안상수, 안철수(이상 전·현직 국회의원), 안희정(전 충남지사), 안춘생(예비역 육군 중장, 전 국회의원), 안필준(예비역 육군 중장), 안철호(육군 소장), 안우만(전 서울지법 부장판사) 등 수많은 인물이 국가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학계: 안세희(전 연세대 총장), 안병욱(숭실대 명예교수, 철학자), 안상원(전 건국대 교육대학원장), 안림(성균관대 명예교수), 안인희(이화여대 명예교수) 등 학문 발전과 후학 양성에 힘쓴 학자들이 많습니다.

문화예술 및 스포츠: 국민배우 안성기, 가수 토니안(본명 안승호), 러시아로 귀화한 쇼트트랙 선수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 전 축구 국가대표 안정환 등 대중에게 사랑받는 인물들도 순흥안씨입니다.

 

이처럼 순흥안씨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학문과 충절을 숭상하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온 대한민국 대표 명문가 중 하나입니다. 시련을 극복하고 국가와 사회 발전에 공헌해온 순흥안씨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순흥안씨 가문의 빛나는 전통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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